[손길신의 철길따라⑤] 호남선 부설이 대한독립의 시작이 된다

  • 하비엔 / 2020-08-10 20:31:21

[하비엔=하비엔 ] 조선왕국 당시 프랑스의 휘브릴(Compagnie de Fives-Lile)사는 1896년 5월 경성~의주 간, 경성~원산 간, 경성~홍주 간의 철도 부설허가를 신청하여 7월 경성~의주 간 경의철도 특허를 받아낸 후 9월 경성~목포 간 경목(京木)철도 부설허가 신청이 철도부설은 우리 스스로 해야 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거부되었고,1898년 6월 대한제국은 호남선을 관설(官設)할 것임을 각국에 통보한 후 7월 6일 철도사(鐵道司) 설치칙령 제1조(國內鐵道를 行將敷設하겠기에 鐵道司를 另設하고....)에서 앞으로 국내철도를 부설 한다고 규정하였다. 


경의철도 부설허가를 받았던 프랑스의 휘브릴사가 자금문제로 허가조건인 3년 내 착공이 불가능해지자 러시아와 일본 등에 특허권을 전매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1899년 6월 그간 준비한 노력의 대가로 향후 부설공사 시 프랑스의 기술자 채용과 자재사용을 요구하는 조건으로 부설특허권을 반환함에 대한철도회사(대표 박기종)가 7월 6일 특허를 출원하였고, 대한제국은 부설권을 외국인에게 전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출원 2일 만인 7월 8일 부설을 허가한 후 경의선 부설 직영계획을 세우고, 1900년 9월 내장원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한 후 1902년 5월 8일 서대문밖에서 서울~송도 간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얼지 않는 항구가 절실한 러시아는 1900년 6월 4일 남해안 항구로 좋은 조건의 마산포에 동양함대의 석탄저장소와 해군병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대한제국과 조차협약(栗九味互約)을 체결하였으나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인이 매수한 율구미 일대의 토지를 문제 삼아 일본은 러시아와 수차례의 협상 끝에 1900년 9월 율구미 해안일대에 산재해 있는 일본인이 사들인 토지와 월영리 해안일대의 러시아 소유 토지를 서로 교환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율구미 일대는 러시아의 조계로, 자복포·월영리 일대는 일본의 조계로 지정하는 등 러시아와 일본의 첨예한 경쟁이 마산포에서 시작되었다.  

▲율구미

박기종은 바닷길로만 물자가 모이는 마산까지 철도를 부설키 위하여 ‘영호(嶺湖)지선철도회사(영남지선철도회사)’를 설립하고 경부철도 지선 부설을 청원하여 1902년 6월27일 농상공부대신 승인과 8월 황실재가를 받은(고종시대사 5집) 후 12월 경부철도주식회사 시부사와에이치(澁澤榮一)사장이 운영하는 일본제일은행과 「차용금 청산까지 철도건설 및 운전에 관한 일체의 공무를 채주에게 위탁하고, 개통일 부터 매년 순익의 80%를 채주에게 지불하고 20%는 회사 경비에 충당하며 5개월 내 측량에 착수하여 완료 후 1년 내 기공, 3년 내 준공 한다」는 부설권 매매수준의 사채차입계약을 체결(주한일본공사관기록16권 기밀155호)함에 따라 1904년 1월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삼랑진~마산포 간 협궤철도 부설을 시작하였지만 일제는 2월 경의철도 부설을 위해 설치된 임시군용철도감부에 마산포선철도건설반을 설치하고 10월부터 광궤철도로 변경한 부설공사를 시작하여 1905년 전구간이 개통된 마산선은 1931년 4월 마산~진주 간 경남선과 통합되어 경전남부선으로 변경되었고, 1956년 진주선으로 개칭되었다가 1968년 진주선과 광주선이 삼랑진~송정리 간 경전선으로 통합되었다.
▲1900년 7월 황성신문
▲1900년12월 황성신문

1895년 법무주사 판임관, 1899년 서북철도회사원 경력을 거친 서오순은 1900년 ‘경인철도운수회사’를 설립하고 철도이용 화물운송을 하다가 11월 서대문밖에 ‘대한운수회사’를 설립한 후 12월 황성신문과 제국신문 등에 외국인과 언어 소통을 위하여 영어와 일어교육 특설학교를 설치하고 졸업생을 대한운수회사 사원으로 채용한다는 광고를 게재하기도 하였으며, 1904년 5월 궁내부 고문 이윤용을 사장으로 추대하여 호남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철도원총재에게 대한운수회사 경영에 의한 철도화물운수 경험을 내세워 경부철도 지선으로 직산부터 강경과 군산 및 공주에서 목포까지 철도를 부설하면 편리하고 좋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어, 자본을 모아서 철도를 부설코자 한다는 청원을 하여, 자본을 모아 조속히 착수할 것과 부설권을 타에 양도할 경우 허가무효는 물론 법에 따라 처분할 것이며, 준공기일 등은 상세한 규정을 제정하여 따로 제출하여야 한다는 조건부로 6월 8일 승인을 받았다.
▲대한매일신보

이에 하야시(林權助)주한일본공사의 7월23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경부선 지선의 부설인준 취소요구에 이하영은 경부지선 인준은 타당하다는 회신문서(照覆第145號)를 보냈으며, 거국적인 후원운동이 일어나 주식모금운동을 시도하면서 철도영업과정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인가를 받았으며(1906. 9.15일 대한매일신보), 범국민적 운동을 바탕으로 호남철도주식회사는 즉시 철도 노선답사에 들어가 1906년10월 조치원~강경 간 측량을 마치고 노선공사를 착수하였지만 1905년12월 설치된 통감부가 1906년 2월 개청되고, 목포, 군산 등 일본거류민들은 ’기성동맹회‘ 또는 ’목포번영회‘라는 이름으로 ’호남철도기성회‘를 조직하고 서울, 인천 등 타 지역 거류민단과 합세하여 호남철도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공립신보


서오순은 주주모집이 미흡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호남선 부설이 대한독립의 시작이 된다(大韓獨立原因在此湖南鐵道凡我同胞共力竣工俾免列强之貽笑至祝 發起人徐午淳書 光武十一年一月二十九日)”는 혈서를 써(1907. 2.25일 대한자강회월보 8호) 주위를 감동시켰지만 일제의 앞잡이가 된 내부대신 송병준이 각 관찰사에게 주식모집을 막으라는 비밀지령을 내림으로서(1908.12.23.공립신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의 압력에 정부는 호남철도부설권인가를 취소하였고, 1909년 5월, 보상비로 129,435원99전을 지급받음으로써, 민족적 열망이었던 호남선 자영의 꿈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독립운동사자료16(의병편Ⅸ) 호남철도관련 자료에 ‘회사자산으로 남는 약 1만원은 본사 경영 공로자인 서오순에게 교부하여 생활비에 충당케 하고자 함’이라는 내용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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