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신의 철길따라④] 대한제국의 두 번째 철도 경부선 부설

  • 하비엔 / 2020-08-03 21:16:55

[하비엔=하비엔 ] 경부철도는 조선왕국 시절인 1892년 4월 우리나라 최초로 철도부설을 논의했던 노선이었다.

 

하지만 성사되지 못한 노선으로 1894년 체결된 「조일잠정합동조관」을 통해 일본이 욕심을 내어 1896년 4월26일 고무라(小村)공사의 문서(京釜鐵道 및 關聯線路許可의 日政府 事前承諾 必要 件), 8월10일 하라다카시(原敬)공사의 부설허가 촉구 문서(日本 實業人과의 京釜鐵道 敷設條約 締結促求 및 京釜鐵道條約案의 供覽 및 敷設許可 要求), 11월21일 가토마스오(加藤增雄)공사의 문서(京釜鐵道 件 暫定中止한다는 詔勅에 抗議 强請) 등 한·일 양국 간많은 공방을 거쳐 1898년 9월 8일 대한제국은 전문 15개조의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에 경부철도의 부설을 허가한 내용에는 궤간은 1,435㎜, 토지 대한정부 제공, 건설자재 관세면제, 노동인력 90% 한인 사용(외국인 채용 시 준공 후 본국송환), 지선부설을 일본 아닌 외국인에 허가금지, 3년 내 착공 10년 내 준공, 준공 후 15년 말 대한제국 정부 가 매수하되 불가능 시 10년씩 연기, 외국인에게 주권양도 금지 조항 등이 포함되었다.

▲경부철도용지 표지석


1929년 조선총독부철도국 발행 ‘조선철도사’에 의하면 경부철도 노선은 1892년 및 1894년의 현지답사에 이어 1899년과 1900년 및 1901년 등 다섯 번의 현지답사를 통해 확정되었으며, 필자는 2012년 4월 부산 동구소재 수정산에서 등산객이 발견한 4개의 ‘경부철도용지’ 표지석에 대한 문화재청의 의견 조회를 의뢰받고, 「경부선의 부산시내 선로는 구덕산에 터널을 뚫고 용두산 서쪽을 거쳐 남쪽 바닷가(지금의 남포동)에 해륙연락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었으며, 그대로 추진했다면 표지석은 선로가 통과하는 위치와 일치될 수 있었지만 구덕산 터널을 피하기 위하여 동쪽 범천동 쪽으로 계획을 변경함에 따라 폐기된 표지석으로 판단된다」고 회신한 적이 있었다.
 

▲경부철도 북부 기공식


선로궤간은 주도세력 간에 표준궤간·1m궤간·일본철도궤간(1,067㎜) 등 3가지 안으로 격론 끝에 경부철도합동조약을 개정해야하는 문제와 대륙철도와의 연계를 위해 표준궤간이 결정되었으며, 일본정부의대장·외무·체신·육군성으로 조직된 경부철도위원회는 1900년 9월 27일 부설지원을 위한 특별보조명령을 내렸으며, 1901년 6월25일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01년 8월20일 영등포에서 북부 기공식, 9월21일 부산초량에서 남부 기공식과 함께 각각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903년11월 경부철도주식회사는 경인철도합자회사를 매수하여 경부선과 경인선 모두를 소유케 되었다.

러일전쟁(1904.02.08.~1905.09.05.) 도발을 앞둔 1903년12월28일 경부철도 개통은 전투함 1척을 구입하는 것이나 1개 사단을 증설하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며(1904.01월 동경경제잡지 제49권 1216호) 앞으로 1년 내 전 구간을 개통시키라는 ‘경부철도속성명령’을 내림과 함께 사장 시부사와에이치(澁澤榮一)를 후루이치(古市公威)로 교체하고 속성 보조금을 지원하면서 회사와 철도 공사에 대한 감독을 대폭 강화하였다.


철도부설 용지공여 책임을 진 대한제국은 재정형편이 어려워 일본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토지를 구입하다보니 용지수용 문제로 각지에서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었으며, 1904년 9월 5일 시흥군에서는 주민들이 군수 부자와 일본인 2명을 살해하는 대규모 민요(民擾)가 발생하여 한국인 주모자들에게만 교수형과 종신징역 등 형벌을 선고하고 탁지부는 사망한 일본인 2명과 부상자 4명에게 3,232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4.경부철도건설공구약도

1902년10월 초량~구포, 영등포~명학 간, 1903년10월 명학~진위 간, 12월 구포~밀양 간, 1904년 4월 밀양~성현 간, 7월 진위~부강 간, 10월 성현~영동 간 개통에 이어 11월10일 부강~영동 간 선로를 심천역에서 연결하면서 초량~영등포간 전구간이 개통되어 초량~부산진~구포~물금~원동~삼랑진~밀양~유천~청도~경산~대구~신동~왜관~약목~금오산~김천~용호~추풍령~황간~미륵~영동~심천~이원~태천~증약~태전(太田:대전)~평촌~신탄진~마니포~부강~내판~조치원~갈거리~전의~소정리~천안~직산~성환~평택~서정리~진위~오산~병점~수원~부곡~군포장~안양~시흥~영등포 등 49개역 267.9마일(431.13㎞) 전 구간이 준공되어 시험운행이 시작되었다.

▲초량~남대문 1등승차권

1905년 1월 1일부터 전 구간 운행이 시작된 경부선열차는 경성06:30시 발 초량20:15분 착, 초량08:00시 발 경성21:45분 도착으로 경성~초량 간 13시간45분이 소요되었으며, 운임은 3등 4원15전, 2등 8원30전, 1등 12원45전으로 3등 칸의 경우 당시 80㎏들이 쌀 한가마니 값(4원)을 약간 초과하는 금액이었으며, 초창기 경부선열차는 초량~영등포 간 운행으로 영등포~경성 간은 경인선열차로 환승하다가 상행열차는 1905년 1월16일, 하행열차는 1월17일부터 초량~경성 간 직통운행이 시작되었다(1905.01.19. 황성신문 3면).

▲초량~부산 간 매립도


경부철도가 초량까지만 개통되자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거류민들은 초량~부산 간 철도연장 운동을 맹렬히 전개한 결과 1905년 4월부터 영국영사관 뒷산에 터널을 파고 해면을 매립하는 등 철도선로 부설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 3월 공사가 끝남에 따라 부산 가역사를 건축하고 1908년 4월 1일부터 부산~신의주 간 개통으로 상행급행 “융(隆)호 열차”(부산 20:00시발 신의주 익일 22:30분 착)와 하행급행 “희(熙)호 열차”(신의주 07:00시 발 부산 익일 09:30분 착) 운행이 시작되었으며, 1910년10월 당시 한국철도의 최신식 건물인 벽돌2층 구조의 부산역사가 준공되어 1층은 역무실, 2층은 스테이션호텔로 사용되었고, 1913년 4월 1일 부산잔교(棧橋)와 부산잔교역이 준공되어 일부 열차는 부산잔교역까지 연장 운행되면서 부산~시모노세키(下關) 간 부관연락선과 연계수송이 시작되었다.

▲ 상 -1910 부산역 중-1913 부산잔교역 하-부산잔교와 관부연락선

**개통초기 한국철도에 근무했던 일본인 에쿠치(江口寬治)의 ‘철도회고록(1936)’에 의하면 당시 철도국간부회의에서 열차명을 대한제국의 환심을 얻기 위해 순종황제 즉위부터 사용된 연호 ‘융희(隆熙)’로 결정하고 북행은 ‘융열차’ 남행은 ‘희열차’로 열차이름을 지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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