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신의 철길 따라⑦] 경의철도와 압록강철교 부설

하비엔 / 기사승인 : 2020-08-24 15: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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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엔=하비엔 ] 1904년 2월 8일 뤼순(旅順)군항 기습공격으로 러일전쟁에 돌입한 일본은 2월21일 경의철도 속성 건설을 위한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하고 철도대대를 편성하여 3월 4일 인천에 상륙하여 3월12일 경의철도 부설관련 일본의 출자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약을 통지하고 삼랑진~마산포 간 철도 노반공사 착공에 이어 서북철도국이 한성~개성 간 착공한 경의철도 노선을 용산~개성 간으로 변경하여 노반공사를 시작하였다. 

▲철도대대의 경의철도 부설모습

 

3월14일에는 임시군용철도감부를 대한제국 주재 일본군사령관 예하부대로 전속시켰으며, 4월 9일에는 한성~개성 간에 이어개성~평양 간 노반공사를 시작하였고, 6월 8일 경의철도를 압록강 연안까지 연장할 것을 결정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제15권의 내용 중 1903년12월 3일 주한일본 공사가 일본 외부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대한철도회사 관계자에게는 본국의 지시에 따라 충분히 사례하고 감사인사까지 받은 사항이 기록되어있어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다만 경의철도 문제에 대해 당국자와 개화파 인사들은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거나 일본 입장에 동조한 반면 민중들은 토지약탈과 인력 강제동원에 기차전복을 시도하거나 투석 등으로 저항하며 토지수용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자 1904년 9월15일 인부의 강제모집을 중지하라는 훈령을 13도 관찰사와 각 향시에 내리기도 하였다.
 

▲공덕리 야산 한인 처형장면

 

1904년 9월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경기도 시흥군수 박우양(朴嵎陽)이 인부를 모집하고, 고용대금을 착복한 사실을 알게 된 군민 만 여 명이 모여 항의하자 일본인에 의뢰하여 군중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성난 군중은 군수와 그의 외아들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2명도 함께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1904년 9월22일자 황성신문에 의하면 8월29일 용산 부근에서 일본 군용철도를 부수다 체포된 아현 거주 김성삼(金聖三), 양주 거주 이춘근(李春勤), 신수철리 거주 안순서(安順瑞) 등 세 사람을 9월 20일 군법회의에서 ‘철도방해’의 명목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곧바로 다음날인 21일 오전 일본 위관 1명이 인솔하는 8명의 헌병이 공덕리 야산에서 총살로 처형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04년10월 3, 4,12일 보도에 의하면 황해도 곡산군에서는 인부 강제모집과 임금 체불에 반발하여 향장 최자범, 김경로 등의 주도로 일본인 6명과 한국인 통역 1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곳에 일본군을 주둔시키고 군민 수십 명을 체포하였으며, 일본인 아오야나기난메이(靑柳南冥)는 이용구를 회장으로 하는 친일단체 일진회(민 씨 일파의 박해로 일본에 망명했던 송병준이 노·일 전쟁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하여 만든 단체)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회원 3천여 명을 징발하여 무보수로 철도부설공사에 참여시킴으로서 경의철도 속성 부설에 크게 기여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경의철도 최초 시운전 모습(용산)


각처에서 민중 저항운동이 빈발했지만 일진회 같은 친일단체의 지원으로 철도 부설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어 1904년 6월 5일 용산 부근에서는 최초의 시운전이 이루어졌고, 1905년 1월26일 신의주까지 선로부설이 준공되었으며, 2월15일 임진강철교가 준공되었고, 3월24일 대동강 제1교에 이어 3월29일 제2교가 준공되었다.


한편 경의선 속성공사에 따른 많은 철도종사원이 필요하게 되자 1905년 3월10일 철도관리양성소(鐵道吏員養成所)*를 인천 구 전환국(典圜局 : 현재 인천여고)터에 설립하고 일본인과 한국인 각 40명씩을 견습생으로 채용하여 운수과(運輸科)와 기차과(汽車科) 2부로 입소시켜 5월28일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경의선 노선도

1905년11월 을사조약의 체결에 이어 1906년 2월 1일 일제는 대한제국의 정치와 군사문제를 섭정하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7월 1일 통감부 산하에 철도관리국을 설치하였으며, 1906년 4월 3일 청천강과 대령강 철교가 준공됨에 따라 용산~신의주 간 499.3㎞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한편 경의철도를 대륙철도와 연결키 위하여 압록강 가교계획을 세우고 1904년 6월 위치선정에 이어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907년12월 북경주재 미국공사에 이어 영국공사가 자국의 선박통행에 지장이 되는 압록강 가교건설 취소요구를 받게 되었으며, 1908년 4월 1일 경부선의 초량~부산 간이 개통되어 경부선열차는 부산을 출발하여 신의주까지 직통운행이 시작되었다.
 

▲상-시운전, 중-보도설치 철교, 하-교량 개폐


미국과 영국의 항의에 1908년11월 교량 중간 부분을 회전시켜 개·폐 할 수 있는 교량으로 설계하여 1909년 9월 신의주 쪽에서 먼저 착공하고, 청국과 건설비를 분담하자는 협의를 시작하여 합의각서를 조인한 후 1910년 4월 안동(지금의 단둥) 쪽에서도 교량 건설공사가 시작되었다.


1911년10월 개·폐식 압록강철교가 준공되어 시운전을 거친 후 11월 1일 개통하여 경의선 열차는 청국의 안동까지 연장 운행이 시작되었으며, 용산~신경(지금의 장춘) 간 주3회의 직통급행열차 운행을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열차장(여객전무)의 승무가 최초로 시작되었다.

 

*설명: 철도관리양성소鐵道吏員養成所는 철도학교의 시작으로, 한자 吏員관리를 뜻하는 으로 발음되는 일본어(りいん)인데 우리 한자 읽는 방식으로 이원이라 표기함으로서 철도이원양성소라는 희한한 단어가 탄생하여 최초 인천에 설립된 양성소를 이원역(경부선) 근처에 있는 이원양성소로 잘못 인식하기도 하였다경부철도주식회사의 경우 철도종사원 교습을 위해 19057월 초량역 구내에 있는 객차를 개조한 교실에서 일본인 20명을 선발하여 보선, 운전, 조사, 장표, 전기통신, 기관차, 법규를 교육하여 동년 12월에 1기생을 배출하고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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