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신의 철길따라②] 1882년부터 검토된 조선왕국 철도이야기

  • 하비엔 / 2020-07-20 22: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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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최초 기차
[하비엔=하비엔 편집국] 조선왕국 제26대 왕 고종12년(1875) 8월21일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의 강화도부근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조·일간 충돌사건으로 이듬해 2월27일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일명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수신사로 임명된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가 일행 75명과 함께 5월 7일 일본에 도착하여 5월27일 출발할 때 까지 20일간의 근대화된 일본 문물을 둘러본 후 1877년 황해도 곡산군수 재임 중 펴낸 “일동기유(日東記游)” 4권의 책에 1874년 개통된 일본철도 요코하마(橫濱)~신바시(新橋) 간 열차승차 경험을 기차를 화륜거(火輪車)라 이름을 붙여 상세히 설명한 것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철도를 알린 기록으로 전해진다.


그 후 1880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문제로 일본에 다녀온 수신사 김홍집은 복명서에서 국가운영에 철도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남겼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외교·통상업무 처리를 위해 제3국인 고문관 추천을 요청하여 청국 이홍장의 추천으로 임명된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사망 후 미망인 로잘리(Rosalie)에 의하여 출간된 그의 수기에 1882년 영국과 일본이 조선에 철도를 부설하자는 제안을 받은 조선정부는 그들 자본으로 부설하는 조건으로 수용코자 하였으나 재정형편상 연기해야 된다는 묄렌도르프의 의견에 따라 연기된 후 1885년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지만 무산되었다는 기록은 우리나라의 철도 부설문제가 1882년에 최초로 논의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1885년 4월 1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일기에 미국영사 휠크가 철도궤칙홍책(鐵道軌則紅冊) 5권을 보내왔다는 기록과 구한국외교문서(10권 美案1호)에 1887년 2월 9일 뉴욕 조선영사(E. Frazar)가 보낸 공한(公翰) 내용 중에 미국이 서울~인천 간 철도를 부설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기록은 당시 미국도 조선의 철도부설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도부설문제가 조선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887년 박정양 주미조선공사를 수행했던 이하영(李夏榮)이 대리공사가 되어 1889년 일시 귀국하였을 때 기관차와 객·화차 등을 연결한 움직이는 모형철도를 들여와 궁중에서 궤도 위를 달리는 철도모습을 보여주며 철도의 실용성을 설명한 때부터라 하겠다. 이하영은 미국에서 귀국한 후 고종임금이 미국기업인 James R. Morse를 초청케 하여 1892년 4월12일 서울~부산 간 경부철도를 Morse의 자금으로 부설하여 25년간 운영으로 투자자금을 회수하는 조건에 추가로 5개의 금광개설권을 부여한다는 조선정부 제안으로 시작된 철도부설협의는 정병하(鄭秉夏) 등의 극력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이에 Morse는 왕복여비와 폐업으로 인한 손해 등 배상금 10,000원(당시 80kg 쌀 2,500가마니 대금 상당액)을 요구하였다. 당시 반대에 앞장섰던 정병하는 1896년 2월11일 아관파천 때 친일 역적으로 군중들에게 참살되었다. 

▲경부선 초창기 계획도

1892년 8월 일본정부는 고노텐주이(河野天瑞) 철도전문기사 와 조선말에 능숙한 보조원 등으로 조직한 철도측량반을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부산에서 서울까지 약 2개월에 걸친 답사 끝에 부산-삼랑진-밀양-대구-상주-문의-청주를 경유하여 남대문에 도착하는 240마일(386㎞)의 철도선로노선계획도를 만들게 하였으며, 이 노선계획도는 계획대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후에 일본이 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할 때 이용된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빌미로 일본은 8,000여 병력을 출동시켜, 6월21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개혁을 강요하여 군국기무처를 설치케 하고, 중앙관제를 왕실업무 전담 궁내부와 서정(庶政)전담 의정부로 나누고, 의정부 산하에 8개 아문을 두었으며, 6월28일 공무아문 산하에 철도국을 설치함으로서 우리나라 정부기구에 최초의 철도기관이 탄생하였다.

내정을 간섭하는 일본군 철수를 요구하자, 그 조건으로 내건 일방적이고 침략적인 내용의 「조일잠정합동조관」을 1894년 8월20일 체결되었으며, 조관 7개의 조항 중 제2항에 다음의 내용을 포함시켜 일본의 철도부설권 장악을 위한 야욕을 문서화한 것이다.
<내정개혁에 관한 항목 중 경부·경인 사이에 건설할 철도에 관한 건은 조선정부가 재정이 아직 여유가 없음을 고려하여 일본정부 혹은 일본의 한 회사와 계약하고 적당한 시기를 택하여 착공하는 것으로 한다. 그러나 현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추진이 어려우므로 좋은 방법을 모색하여 속히 계약과 착공을 추진하기로 한다.>

1895.10월 을미사변이후 1896년 2월11일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관에 머물던 고종은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3월29일 미국인 Morse에게 경인철도 부설을 허가함으로서 경부철도 협의 무산에 따른 배상금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이를 본 프랑스가 4월24일 경의철도(경성~의주) 부설허가를 요청하여 7월 3일 허가를 받자, 주한독일 총영사(Krien. F.)는 8월 1일 경원선(경성~원산) 부설허가를 요청하였고, 프랑스는 9월30일 경원철도(경성~원산)와 경목철도(경성~목포) 부설허가를 추가 요청하였으나 조선왕국은 모두 불허하였다.

▲인천시내 철도약도 

 

경인철도부설 허가를 받은 Morse의 인천-우각동-부평-소사-오류동-노량진-남대문-경성 간 노선계획에 인천역예정지 답동의 토지소유자 히구치헤에고(樋口平吾) 등 일본인 2명이 부지사용을 거부하여 인천~우각동 간 유현(杻峴)역을 추가한 인천시내 의 새로운 철도노선을 설계하였고, 새 인천역예정지 만석동방면 토지 소유주인 독일인(Wolter)과 영국인(Stripling) 및 일본인 2명 등 4명의 토지 소유자는 그곳에 철도를 부설한다면 정부에 무상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이 소식을 들은 최초 인천역 예정지의 토지 소유주가 재협상을 요구했지만 이때는 허가 후 1년 내착공해야 한다는 부설허가 조건일(1897. 3.28.)이 임박함에 따라 이미 역 위치가 확정된 우각동역 터에서 1897년 3월22일 우리나라(조선왕국) 최초의 철도부설 기공식이 거행된 것이다.  

▲경인철도기공식(1897.03.22.)

1897년10월12일 나라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조선국왕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로 격상되면서 조선왕국의 철도이야기가 마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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