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신의 철길 따라 23화 ] 사고가 많았던 미군정기(美軍政期)의 철도

편집국 / 기사승인 : 2021-01-04 1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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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정청
[하비엔=편집국] ‘미 군정기’는 1945년 8월15일 일제 패망 후 미군 제24군단이 통치시작 후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까지로 공식적인 명칭은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이며 이때의 정부 명칭은 ’남조선과도정부‘라 했다.

1979년 철도청발행 ‘한국철도80년약사’에 의하면 해방당시 철도현황은 아래 표와 같으며 1945년 9월 6일 Ward L. Hamilton중령이 미 군정청 교통국장으로 취임하여 9월11일 남북 간 철도운행이 중지되었다.

▲ 해방당시 철도현황표

9월29일 대구역에서는 열차 충돌로 73명이 사망하여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와 대구청년동맹 등이 부상자 구호활동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건국준비치안유지회’라는 단체는 9월 8일자로 해체된 단체였으며, 당시에는 발행된 신문이 없었고, 이 사고와 관련된 역사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확인이 불가능한 형편이다.


1945년10월27일 일본인 철도종사원을 모두 사직시켰고, 1946년 3월 4일 철도경호를 위하여 철도경찰부 및 철도경찰학교를 설치하고 주요역에 철도경찰서를 설치하였으며, 5월 7일 공포 10일 후부터 효력을 발생하는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제75호를 공포하여 조선철도·경남철도·경춘철도주식회사를 국유화 하여, 사설철도로 운영되던 조치원~충주 간 충북선, 천안~장항 간 충남선, 천안~안성 간 안성선, 수원~여주 간 수여선, 수원~남인천 간 수인선, 성동~춘천 간 경춘선, 철암~묵호항 간 철암선, 북평~삼척 간 삼척선 등 8개 노선이 국유철도에 합병되었다. 

▲조선해방자호

 

일제강점기 말단직에서 근무했던 한국 철도종사원 들은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로 증기기관차 복원에 성공하여 ‘조선해방자호’라는 이름으로 1946년 5월19일 서울역 전시회에 참석한 미 주둔군 최고사령관 John Reed Hodge중장은 왜적이 떠난 후 짧은 기간에 한국 사람의 손으로 과학기술의 상징으로 조선해방자호를 탄생시킨데 그치지 않고 3천만 민족이 한데 뭉쳐 건설의 힘을 나타낼 것이라며 극찬을 했고, 다음날부터 서울~부산 간 특급열차로 운행(9시간 40분소요)을 시작했다. 

 

이어서 9월 1일부터는 경부선급행열차 무궁화호와 호남선 급행열차 삼천리호가 운행을 시작했다.

갑자기 남북이 단절된 혼란한 당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노동자평의회 주도로 1946년 9월23일 부산지역 7천여 철도노동자부터 시작된 파업은 전국으로 번져 4만여 철도노동자가 참여하였다.  

 

남조선 국방경비대와 해상경비대 및 주한미군내의 미국공산당원 수 십 명까지 합세하여 조선에서 미군철퇴를 주장하는 시위로 번지자 9월30일 미군정경찰은 총파업의 거점인 서울 철도 파업단에 탱크와 무장경관을 투입하고, 김두한의 대한민청 등 반공우파 청년단 천 여 명이 가세한 시가전에서 3명의 간부가 사망하고 부상자 수백 명에 1,700여명이 우파세력에게 연행되면서 10월 1일 파업이 해제되었다. 

▲1947.11.01일 최초로 ‘서울역’이라 명명 

 

또한 1946년11월13일 영등포역구내에서 통근열차와 구내입환 기관차가 충돌하여 14~18세의 학생들이 대부분인 42명의 사망자와 7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사고에 이어 11월22일 삼랑진~원동간의 열차충돌사고로 기관차승무원과 미군1명 등 4명이 사망하고, 4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1947년 3월19일은 미국에서 최초로 증기기관차 30대가 부산항에 도착하였으며, 8월 9일에는 미소공동위원회 관련 객차 2량을 연결한 러시아열차가 서울~평양 간을 2회 왕복운행을 하였다. 그리고 남대문역으로 시작하여 경성역으로 바뀌었던 역명을 11월 1일 서울역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47년 말 철도종사원은 34,033명이었다.

1948년 8월 6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안동역을 향하던 제551열차가 도농역을 출발하여 약 2㎞를 달리던 중 철교위에서 기관차 다음 연결된 소화물차1량과 객차 3량이 탈선 전복되면서 객차 1량이 약11m아래로 추락하여 9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의 중·경상자를 발생시킨 중앙선 열차추락 전복사고가 발생하였으며 사망자 1인당 7만원의 위자료가 지급되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으로 운수부를 교통부로 개편하고, 미 군정에서 한국인 운수부장으로 위촉했던 민희식부장은 초대 교통부장관에 임명(50여일 후 초대 미국 Los Angeles 총영사관으로 이임)하였으며, 9월13일자로 교통부가 남조선과도정부의 운수부와 그 소속기관을 인수하였다(1948.9.13.관보 제3호).

교통부가 소속기관을 인수받은 다음 날 9월14일 경부선 내판역에서 열차 추돌사고에 의하여 미군 25명, 한국인 1명의 사망자와 미군 78명과 한국인 2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대 참변이 일어났으며, 이 사고는 부산발 서울행 조선해방자호 제2열차가 기관차 고장으로 내판역에 정차하여 수리하던 중 바로이어 내판역을 통과하는 목포발 서울행 서부해방자호 제32열차가 미군이 승차한 객차 2량이 후부에 연결된 제2열차를 추돌하면서 후부 객차 2량의 파손으로 다수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한 사고였다. 

▲ 19481006동아일보

조사결과 당시 남로당원들이 제2열차의 후부연결 객차에 미군단체가 승차한다는 계획을 미리 확인하고, 9월11일과 12일 이틀에 걸쳐 부강역장과 승무원 10여명이 수원소재 모 여관에 모여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 당일 제2열차 기관사는 통과해야 할 내판역에 기관차 고장이라는 구실로 정차하고, 바로 뛰 따라 내판역을 통과하는 제32열차가 정차중인 제2열차와 같은 선로로 진입하도록 선로전환기를 조작하여 고의적인 추돌사고를 일으킴으로서 다수의 미군 사망자를 발생케 한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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