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신의 철길 따라⑧] 척식(拓殖 : 일본인 이주 정착)을 위해 먼저 부설된 호남선

  • 편집국 / 2020-08-31 10:30:29

[하비엔=편집국] 1896년 9월 프랑스 휘브릴사의 그리루가 경성∼목포 간 경목선(京木線)부설권 요구로 시작되어 불허된 후 일본과 영국에서도 철도부설을 요구해 오자, 대한제국정부는 1898년 8월 호남선 관설안(官設案)을 의결하고 프랑스와 영국 및 일본에 통보하자 일본은 대한제국정부가 스스로 철도를 부설 하려는 것이 아니고 외국의 압력을 배제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아예 경부철도 노선을 호남지방을 경유하여 노선을 통합할 계획으로 경부철도 노선을 호남지방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측량까지 해보았지만 건설비의 과다로 포기한바 있다.

 

호남철도는 1904년 6월 8일 호남철도주식회사가 부설허가를 받은 후 자력부설 운동은 황실에서도 주식 1만주 인수를 결정하고 고종은 주식과는 별도로 직접 1만원을 하사(1907년 1월 4일 대한매일신보)한 후 시종 이용재를 파견하여 주식 모집상황을 하문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표하는 등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반면 통감부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1907년 1월 사장 이윤용을 퇴임케 하자 서오순은 그동안 철도부설에 적극적이었던 정현철, 변영훈, 오귀영 등 중하위 관료출신 자본가들과 김기영, 성문영, 조진태, 백완혁 등의 거상들로 임원을 개편하여 자금 동원력과 실무역량을 한층 강화하는 형태로 대응하였다.

 

특히 1907년 2월에는 윤정석, 백주현, 정동식, 손석기 등 유력 자본가들이 대거 참여하여 호남철도정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주주 모집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1907년 8월 서오순, 오귀영 등은 일인들과 합작형태로 라도 호남철도를 부설하려는 계약까지 체결하자 농상공부는 사전에 통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서를 압수해 버림에 서오순은 일본에까지 건너가 호남철도를 자력 부설할 수 있음을 호소하는 등 노력하였지만, 통감부의 호남철도 장악 시도에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무렵 갑작스럽게 유길준, 윤효정, 홍긍섭, 이동휘, 장박, 이응익 등 각계의 유력자들이 ‘호남철도주식모집연구회’를 결성하여 명목상으로는 주식을 범국민적으로 모집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나 “호남철도 부설권은 서오순 1인에게 허가된 것이 아닌 전 국민에게 허가된 것”이라는 전제 하에 주식을 전 국민으로부터 모집하는 한편, 부족한 자금은 통감부에 의뢰하여 차관을 얻겠다는 내용의 활동계획을 수립하고 서오순에게 철도부설 인허장과 도장을 연구회에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다.

한편 통감부는 연구회 활동을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후원하고, 1908년 9월부터는 호남과 호서 일대에서 관찰사, 군수를 주식모집위원으로 대거 동원하는 한편, 각지에 모집 주수까지 할당하는 등, 강권적인 주식모집 운동까지 벌어졌던 것은 호남철도 부설권이 특정 개인에게 인허되어 있는 상황에서 강제로 박탈하면 대외적으로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통감부가 가장 강경하게 저항하는 서오순의 인허권을 ‘범국민적’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호남철도주식모집연구회로 이관한 후 통감부 직할로 이관하는 것이 용이한 일이며, 대한제국 국민에게서 호남철도의 주식을 다수 모집하더라도 결국은 일본의 호남철도 부설을 위한 자금 모집에도 도움이 된다는 판단으로 한국인의 권리는 탈취하되 한국인의 자금은 동원한다는 교묘한 방침이 채택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1923.12.23.공립신보

그 결과 1908년11월 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호남철도주식모집연구회에서 모집한 주식의 수는 경성을 비롯 충남과 전남·북에서 도합 300,000여주에 달한다 하였지만 1908년11월 갑자기 내부대신 송병준 명의로 행정관청의 주식모집에 대한 개입을 금지한다는 비훈이 내려졌고(1908년12월23일 공립신보), 1909년 5월부터는 호남철도주식회사 일체를 탁지부(度支部 : 대한제국 재무담당 부서로 재무관련 일체를 감독했던 기관) 재산정리국에서 조사하기 시작함으로써 호남철도 부설을 위한 노력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호남선과 경원선 부설문제를 둘러싸고 군사목적상 경원선을 먼저 부설해야 된다는 육군대신의 의견과 철도경영 및 척식(拓殖 : 국외 영토나 미개지를 개척하여 자국민의 이주와 정착을 촉진하는 것)을 위해서는 호남선을 먼저 부설한 후 경원선을 부설해야 된다는 체신대신의 의견 및 두 선을 동시에 부설해야 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으나 동시 부설은 예산문제로 적절치 못하여 결국은 척식을 위하여 호남선을 먼저 착공해야 된다는 주장이 연말에 채택되었으며, 호남선은 경부선의 지선으로 부설해야 된다는 결정이 나자 1910년 2월 공주, 조치원, 청주지역 일본인 거류민들이 결성한 ‘삼남철도기성동맹회’는 조치원역에서 호남선이 시작되기를 청원하였으나 일본철도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전을 분기점으로 결정하였다. 

▲ 호남선 노선도

호남선은 1910년 1월 착공하여, 1911년 7월 대전∼연산 간 39.9㎞를 개통한 것을 시작으로, 연산∼강경 구간(1911년11월), 강경∼이리 구간 및 호남선의 지선인 이리∼군산 구간(1912년 3월), 이리∼김제 구간(1912년10월), 김제∼정읍 구간(1912년12월), 나주∼학교 구간(1913년 7월), 학교∼목포 구간(1913년 5월), 송정리∼나주 구간(1913년10월)이 개통되고, 1914년 1월11일 정읍∼송정리 구간이 최종 개통됨에 따라 대전∼목포 간 군산선 지선을 포함한 총 293.6㎞의 호남선 전구간이 개통되어, 1914년 1월 22일 호남선 전통식이 목포역에서 거행되었다.  

▲ 개통당시 목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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