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신의 철길 따라⑰] 유난히 파업이 잦았던 평원선(平元線) 부설공사

  • 편집국 / 2020-11-02 18: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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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선 
[하비엔=편집국] 1907년 7월 8일 일본헌병대기밀보고서인 ‘헌기 제1384호’(통감부문서 6권)에 당시 경성일보에 ’새로 취임한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통감이 평원선을 부설할 의향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에 인천 거류민들이 인천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며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시도하고 있으며, 평양~원산 간 평원선보다는 경성, 용산, 인천, 원산의 거류민들과 협력하여 경성~원산 간 경원선을 건설하도록 하겠다는 결의를 하였다는 보고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평원선은 낭림산맥에서 언진산맥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통과하는 동서횡단 철도노선으로 신문보도에 따르면 노선문제로 각 지역 거류민들의 자기지역 경유 요구운동이 격렬해짐에 따라 총독부 토목회의를 거쳐 1920년 9월 9일 각 지역 절충안으로 노선을 결정한 후 착공이 지연되자 거류민들의 속성운동이 이어졌으며, 1922년 8월 경의선 서포역부터 예정노선의 실측이 시작되자 평양시민들은 기점은 평양역이어야 된다며 기점문제로 상경 진정하는 등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평원선 공사현장

예산문제로 계속 늦어지는 중 1926년 1월16일자 동아일보의 ‘금년 철도건설개량공사 예산 1,500만원 중 평원선 건설에 60만원이 배정되어 서포~사인장 간 공사를 착수한다’는 기사가 보도된 후 공사인부 부족으로 어려움을 격어 1926년 5월 6일에야 경의선 서포역에서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1926년11월27일자 신문에 예산사정으로 공사기간 3년을 연장하여 10년간 계속공사로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1927년 6월16일 인부 350명이 임금문제로 파업에 돌입하자 공사 청부업자는 밀린 임금을 지급하여 18일부터 복귀가 시작되었지만 인부들의 동요가 주목된다는 신문보도에 원산상업회의소 평의원회는 평원선 속성공사를 총독에게 진정하는 등 문제가 계속되는 가운데도 1927년11월 1일 서포~사인장 간 25㎞가 개통되어 열차운행이 시작되었지만 다음날부터 공사인부 576명이 임금체불로 동맹파업을 시작하였고, 11월 6일에는 중국인노동자 35명이 임금을 자주 체불하는 일본인 청부업자를 폭행하고 경의선 사리원 방면으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28년10월15일 신문보도에 의하면 4월부터 7월까지 반대편 고원~성내 간 측량을 마치고 10월 1일부터 공사를 시작한다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자 10월12일 평원선 속성 공사를 위한 고원시민대회를 개최한 후 총독부에 항의하자, 철도국은 내년 봄이나 가을에 기공한다는 대답을 하였으며, 반대편 공사구간에서는 사인장~순천 간 22.3㎞가 1928년10월15일 개통되어 열차운행구간이 연장되었고, 1929년10월에는 긴축정책에 따른 평원선 공사 지연을 염려하는 평원선기성대회가 개최되는 가운데 1929년10월 1일 순천~신창 간 19.7㎞가 추가로 개통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30년 4월 6일 신문보도에 의하면 평원선 마전령 지방에 1장2척(약 3m60㎝)의 적설로 공사는 물론 주민생계에 큰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며, 같은 해 12월 신문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내년 봄에 온다며 안동(단둥)행 열차를 타고 떠났다는 소식이 실렸고, 1931년10월 1일 신창~장림 간 29.5㎞가 추가 개통되었다.

1931년 다시 시작된 공사는 임금체불, 노동자 구타 및 저임금으로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여 하루 최소한 1,000명의 인부가 필요함에도 300여명밖에 구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노동자의 임금은 하루 13시간 노동에 3,40전이 지급되었다 했는데, 몇 년 후의 일이긴 하지만 1935년 만포선 공사 시 노동인력이 부족하자 총독부 사회과에서 일당 80전에 노동복 한 벌 추가지급 조건으로 인부 2,000명을 알선했던 사실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7월 3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평원선 공사 중 가장 난공사인 토령터널은 나선형으로 산속에서 곡선을 지을 것이며, 이제 착공하면 3년이 소요된다고 보도된 토령터널 공사 중 샘물이 공사 중인 터널로 새어나가 50여 가구가 먹을 물이 없어져 떠나야 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936. 5. 6일 동아일보).

 

노동인력 부족으로 토령터널공사와 덕지강 제방공사가 지연되는 가운데 1936년 11월 초에는 임금체불로 인부 575명이 총 파업을 시작하기도 하였지만 토령터널 공사 중 뜻밖에 천연 암굴이 발견됨에 따라 3년 계획이었던 공사를 2년만인 1937년 7월 개통하는 행운이 따르기도 하였다.

평원선 시각표(1944. 2. 1.현재)

장림~~양덕구간 27.4㎞가 1936년11월 1일 추가 개통되고, 반대편 구간인 고원~성내 간 30㎞가 1937년12월16일 개통되자 고원~성내 구간을 평원동부선으로 선로명칭을 변경하고, 이미 개통된 반대편 구간을 평원서부선으로 명칭을 구분(1937.11.27.관보 제3261호)하였다. 

 

1941년 4월 1일 최종 구간인 양덕~성내 간 58.7㎞가 개통됨으로서 착공 15년 만에 서포역부터 용성~마람~배산점~사인장~봉학~자산~순천~봉하~은산~수양~신창~수덕~신성천~거흥~장림~동원~인평~지수~양덕~내동~석탕온천~거차~천을~운곡~관평~천성~성내~인흥~축전~미둔~부래산~경원선 고원까지 212.6㎞가 완공되었다.

평원선 전 구간 개통에 따라 평원서부선과 평원동부선으로 분리했던 선로명칭을 본래의 평원선으로 환원했으며(1941. 3. 8.관보 제4236호) 평원선 개통으로 평양에는 조차장이 신설되고, 고원은 목탄수출에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원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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